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KIA 타이거즈/역사 (문단 편집) === 감당하기 힘든 연봉 === KIA 타이거즈의 탄생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1980년대의 야구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는 각 구단들이 연고지의 지역연고 선수들을 '''무제한 지명'''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연고 1차지명은 점점 축소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는 신인 육성의 개념이 딱히 없었고 즉시전력감 선수를 뽑아 시즌에 바로 써먹는 풍조가 확실했다. 이 풍조 덕분에 [[해태 타이거즈]]는 리그 초창기부터 강호로 발돋움하고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왕조(스포츠)|왕조]] 구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당대 학생야구 팜 중 최고의 유망주 양산지 중 한 곳이던 호남지역 팜의 최상위권 유망주들을 싹쓸이했던 것과[* 해태의 역대 신인 1차지명 선수 중 이 시기에 뽑힌 주요 선수들로 [[문희수]]('84), '''[[선동열]], [[이순철]]'''('85), [[김정수(1962)|김정수]], [[이건열]], '''[[장채근]]'''('86), [[박철우(야구)|박철우]], [[백인수|백인호]]('87), '''[[조계현]]'''('88), '''[[이강철]]'''('89), [[정회열]], ~~[[이호성]]~~('90), '''[[이종범]]'''('93) 등이다. 이 명단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이 중에 한국시리즈 MVP만 무려 6명(김정수, 문희수, 박철우, 장채근, 이종범, 이강철)이다.] 실력과 개성을 두루 갖춘 선수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한 [[김응용]] 감독의 지도력, 전국 각지에서 열성적 응원을 보내주던 팬들의 지지가 하나로 융합된 것이 영향을 미쳤다. 다만 당시는 이름만 프로야구일 뿐, 경기력, 리그 운영, 신인 육성, 피지컬 트레이닝, 스카우트 등 전반적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투자가 성적으로 꼭 직결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전용 훈련장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경산야구장]] 건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의 제휴, 미국 전지훈련 등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던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을 하지 못하고 오랜기간 콩라인에 머물러 있던 것이다.] 거기에 FA 제도도 없고 각 구단들의 담합에 따른 연봉 인상 제한[* 1990년대 초반까지는 KBO 차원에서 매년 연봉인상률을 25%로 제한하였다.] 등으로 각 구단별 예산의 격차가 크지도 않았다. 하지만 당시 재벌 중에서도 하위권이었던 [[해태그룹]]은 자금력 측면에서 다른 재벌 구단에 비해서 현저하게 뒤진게 사실이었고[* 1982년 초에 팀을 창단하려고 할 때도 아예 정부를 향해 금융지원을 해달라고 읍소한 전례가 있다. 당시 정부가 이 읍소를 받아들인 것은 해태가 호남 연고팀을 맡아줄 유일한 해답이었고 호남 연고팀의 주인을 찾지 못하면 리그 출범 자체가 삐걱거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해태는 선수단 연봉을 지나치게 짜게 준다는 불만이 노골적으로 터져 나올 정도였다. 이에 관해서는 해태 타이거즈의 [[해태 타이거즈#s-3.4|부실 지원 문제]]를 참고. 그리고 1990년대 접어들면서 프로야구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자금력이 취약했던 해태와 여타 구단의 격차는 날이 갈 수록 벌어지기 시작했다.[* 1996 고졸우선지명선수 [[서재응]], 1997 고졸우선지명선수 [[김병현]], 1998 1차지명선수 [[최희섭]]이 이 시기에 해태 입단을 거부하고 대학을 거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선언했다. 또한 1996 시즌 개막 직전 1992 1차지명선수이던 [[박재홍(야구)|박재홍]]을 갓 출범한 재벌구단 [[현대 유니콘스]]에 빼앗겼다. 물론 저 4명은 KIA로 바뀐 이후긴 하지만 어쨌든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게 되며 2004년 이후 이적하게 된 박재홍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타이거즈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저들이 고스란히 들어왔다면 해태는 출범이후 30년간 왕조를 세웠을지도..--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야구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진원지는 당시 야구단을 창단하려고 몸부림을 쳤던 [[현대그룹]]이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프로야구 출범을 준비하면서 강원도 통천이 고향이었던 [[정주영]] 회장한테 인천·경기·강원 연고 프로야구단 창단을 제안하였지만 서울올림픽에 집중하고 싶다면서 거절당했다.[* 일단 정주영 회장 본인이 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씨름과 농구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으로 유명하며 현대 일가가 야구보다는 축구 쪽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이는 훗날 현대-KIA차 회장인 정의선도 유사해서 야구단쪽에는 양궁과 같은 다른 산하 스포츠단에 비해선 큰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투자를 아예 안 한건 아니지만.] 그리고 인천/경기 지역 연고에는 인천에 공장을 가지고 있던 삼미그룹이 자진해서 나서면서 결국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되었다. 하지만 프로야구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1990년대 들어서 [[현대]]도 프로야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던 다른 [[재벌]]들의 견제로 진입이 쉽지가 않았다. 당시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현대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신생팀 제 9구단 창단도 힘들고, 다른 팀을 인수하려고 해도 신통치 않자 현대그룹은 [[현대 피닉스]]라는 [[한국실업야구|실업야구단]]을 창단해서는 기존 프로야구단을 훌쩍 뛰어넘는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고 KBO와는 별도의 리그 창설을 구상하는 등[* 당시 아마야구의 선수층을 감안하면 현실성이 없었지만.] 당시 아마야구 유망주들을 말 그대로 싹쓸이 해버렸다. 프로에서 족히 4~5년은 뛰어 지명도를 얻어야만 가능했던 꿈의 액수라고 알려진 1억대의 연봉이 프로 데뷔를 하지 않은 젊은 선수들에게 뿌려지자, 타 구단들은 유망주들을 모셔오고자 현대의 제시 금액을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KBO 구단들과 현대그룹은 정면충돌하였고, 아마야구계는 선수확보를 둘러싼 양자의 이전투구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결국 이 갈등은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서 [[현대 유니콘스]]로 이름을 바꾸는 방식으로 프로야구에 진입하면서 봉합되었다. 하지만 [[현대 유니콘스]] 창단 이후에도 기존 [[현대 피닉스]] 소속 선수들의 보유권을 인정하는 문제를 가지고 기존 구단들과 현대그룹이 또 충돌했다. 참고로 1982년 프로야구 출범때는 기존 실업야구팀들의 선수보유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어찌하던 이 문제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막강한 위세에 밀려서 어정쩡한 타협이 이루어졌고 롯데 자이언츠는 애초에 자신들의 연고 선수였던 [[문동환]]을 위약금을 전액 탕감하는 대신 [[전준호(1969)|전준호]]를 현대 유니콘스에 내주는 형식을 통해서 데려와야만 했다.[* 그리고 이때 해태는 박재홍이 이 인질극에 걸려버렸고 이때 현대가 박재홍을 얻고 싶으면 홍현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나마 돈은 많았던 롯데와 달리 돈이 없는데다 당당한 주전이던 홍현우를 포기할 수 없었던 해태는 눈물을 머금고 박재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아직 SNS나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탓에 광주 쪽에는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했고 이에 분노한 광주의 해태팬들이 박재홍을 성토하며 박재홍의 선수생활 내내 꼬리표처럼 오명이 따라다녔다. 이는 박재홍이 은퇴한 2010년대 후반이 되서야 저 정보가 알려지고 나서야 비로소 풀렸으며(그리고 저때면 성토하던 올드팬들도 다 늙어 죽거나 해서 수가 많이 줄기도 했다.)박재홍이 2022년에 한 인터뷰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고향팀에서 뛰면서 고향팬들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아직도 박재홍 본인에게 큰 상처로 남아있다.] 그리고 재계 서열 1위의 현대가 야구판에 등장하면서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라는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은 야구판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기 시작한다. 두팀은 신인 계약금과 선수단 연봉으로 고액을 책정했고, 그 외에 승리 수당과 각종 보너스도 건네줬다. 거기에 2군 전용 훈련장, 외국인 코치, 트레이닝 시설 등 시설 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트레이드|선수들을 들여올 때도]] 현찰 박치기를 하는 등 [[돈지랄|야구단에 거액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다른 구단들도 최소한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계약금과 연봉을 훨씬 높여줄 수 밖에 없었고, 야구단 운영비가 치솟기 시작했다. 이제 [[KBO 리그]]에도 본격적인 '''머니게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자금력이 취약했던 호남 연고의 두 구단 [[해태 타이거즈]]와 [[쌍방울 레이더스]]는 야구단 운영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